열왕기하13-17장 | 권민철 | 2021-02-1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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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 나를 살린다" (63강) - 열왕기하13-17장
지난주에 '오므리 왕조'(오므리-아합-아하시아-여호람)가 '예후 혁명'으로 무너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여기에는 '엘리야', '엘라사' 중심에 서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에는 이제 '예후 왕조'가 시작됩니다. '오므리'와 '예후' 왕조는 이스라엘에 기둥이 된 두 왕조입니다. 예후 왕조의 몰락으로 이스라엘은 BC 721년에 앗시리아에 멸망합니다.
반면 남 유다는 북 이스라엘 멸망 전까지 큰 힘을 쓰지 못했지만, 멸망한 후 히스기아, 요시아 왕을 중심으로 종교개혁을 단행합니다. 하지만 이후 왕들의 타락으로 유다도 결국 BC 587년에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신명기 역사가’가 이런 남, 북 이스라엘의 역사를 낱낱이 기록한 이유는 역사를 통해서 '반성'하고 '길'을 찾고자 했던 것입니다. 열왕기서를 히브리 성서에서 '역사서'가 아닌 '예언서'로 분류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역사를 들려주려는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찾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왕들을 평가할 때도 '업적'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평가를 내립니다. 하나님을 잘 섬겼던 '다윗'과 그러지 못한 '여로보암'이 평가의 기준이 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 입니다.
* 13장 '예후 왕조'가 시작됩니다. 예후가 죽고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왕이 됩니다. 예후가 아합의 아들들과 이세벨, 그리고 유다 왕가 사람들을 제거함으로 혁명에는 성공했지만, 이 일로 페니키아와 유다와의 관계가 단절됩니다. 이웃나라들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이웃 나라의 도움을 받지 못한 '여호와하스'는 시리아의 속국이 되고 참혹한 굴욕을 당합니다.(1-9절) 칠 년 통치 후 아들 '여호아스'가 왕이 되어 시리아에게 빼앗긴 땅을 일부 되찾기는 하지만 형편은 마찬가지입니다.(10-13절) 그리고 엘리사의 죽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엘리사도 스승 엘리야와 같이 바알신앙에서 이스라엘을 지킨 '병거'와 '마병'이었습니다.(14절)
* 14장 유다에서는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가 왕이 됩니다. 아마샤는 먼저 아버지 요아스를 죽인 신하들을 처형하고(5절), 한 때 속국이었던 ‘에돔’도 되찾습니다. 하지만 그의 오만으로 벌어진 이스라엘과의 '벳세메스' 전투에서 크게 패합니다.(8-16절)
이제 북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왕권을 가졌던 '여로보암'이 등장합니다.(23-29절) 북 이스라엘을 만든 여로보암과 구별하기 위해서 '여로보암 2세'라고로 부릅니다. 여로보암은 하맛 어귀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가장 넓은 땅을 차지합니다. 신명기 사가는 그에 관하여 ‘7절’로 짧게 소개하고 있지만 그는 주변국을 쉽게 제압할 정도로 힘을 가진 왕이었습니다. 이때 여로보암의 번영은 시리아의 내분으로 인하여 주어진 기회였습니다.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여로보암 통치 때 처음으로 '문서 예언자'가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문서 예언자'란 자신의 이름으로 예언을 기록을 남긴 자들입니다. 성경에는 이사야를 시작으로 12명의 문서 예언자가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예언자는 '아모스'입니다.(BC 750년) 그 후 '호세아'가 등장합니다.(BC 745년) 이 두 예언자의 예언의 배경은 바로 ‘여로보암 2세’의 통치입니다.(BC 786-746년)
최초의 문서 예언자인 아모스는 여로보암의 통치를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상아 궁, 화려한 여름 별장, 겨울 별장에 살면서 가난한 자들은 신 한 켤레의 값으로 사는 세상을 비판합니다. 정의와 공의가 무너진 세상을 향해 심판을 선포합니다. 호세아도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번영의 기회를 우상숭배와 타락으로 날려버린 이스라엘 심판합니다. 구제적인 예언의 내용은 예언서를 읽을 때 나누겠지만, 두 예언자의 예언 배경은 ‘여로보암’ 때입니다.
* 15장 유다와 이스라엘을 지긋지긋하게 괴롭히던 '시리아'가 내분으로 혼란을 겪게 되자 두 나라에는 평화가 찾아옵니다. 그 기회를 이스라엘에서는 '여로보암'이, 유다에서는 '아마샤(웃시아)'가 누립니다. 여기에서도 기억해야 할 것은 ‘웃시아’가 죽던 해에 남 유다에서도 예언자가 일어납니다. 바로 '이사야'입니다.(BC 742-700년) 이사야는 자기 시대를 소와 나귀도 임자를 아는데, 백성들은 하나님을 버린 시대라고 말합니다.(사1:3) 시리아의 혼란은 분명 하나님이 주신 '기회'임에도 불구하고, 유다와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나는 '기회'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예언자들의 뼈아픈 지적입니다.
북 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이 죽고 그의 아들 '스가랴'가 6개월을 통치하지만 '살룸'의 반역으로 '예후 왕조'가 막을 내립니다.(8-12절) 이후 엄청난 혼란을 겪습니다. 살룸은 단 한 달 만에 '므나헴'의 반역으로 죽습니다.(13-16절) 므나헴 10년을 통치하지만 앗시리아의 등장으로 속국이 됩니다.(17-22절) 그 후 '브가히야'가 2년을 통치하였고(23-26절), 베가가 반역을 하여 10년을 통치합니다.(27-31절) 베가가 통치할 때에 앗시리아는 이스라엘 주민을 포로로 잡아 갑니다.(29절)
이제 '앗시리아'가 등장합니다. 시리아의 혼란을 틈타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점령한 앗시리아는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쳐들어옵니다. 시리아 다음으로 등장한 '앗시리아'는 이스라엘에 가장 무서운 적이 됩니다. 전쟁 포로들을 코에 갈고리를 꿰어 끌어갈 정도로 악독한 나라입니다.
* 16장 유다 '아하스' 왕 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시리아의 '르신'과 이스라엘의 '베가'는 유다의 '아하스'에게 앗시리아에 대항할 공동전선을 만들자고 제안합니다. 아하스가 그 제안을 거부하자 '르신'과 '베가'는 유다를 먼저 공격합니다.(5절) 이때의 상황은 이사야 7장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리아-이스라엘의 공격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예언자를 통해 말씀하셨지만(사7:4절), 유다의 아하스는 앗시리아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7-8절)
앗시리아에게 도움을 청한 유다의 아하스의 선택으로 동족 이스라엘은 결국 앗시리아의 포로가 되고, 호세아 왕 때에 멸망합니다. 아하스 왕도 위기는 모면할 수 있었으나, 앗시리아의 속국이 됩니다. 솔로몬의 성전을 다마스쿠스의 신전 모양으로 바꾼 것은 앗시리아에 대한 충성의 맹세입니다.(10-20절)
* 17장 호세아는 앗시리아의 속국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이집트를 발판으로 반역을 기도했지만 실패하고, 이스라엘은 역사에서 사라지게 됩니다.(BC 721년) 성경은 이스라엘 멸망의 이유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꼭 7-23절까지 천천히 그 이유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의 멸망으로 인하여 수도 '사마리아'에서 일어난 일입니다.(24-41절) 앗시리아의 포로 정책은 '혼합정책'입니다. 사마리아에서는 천민들을 제외한 제사장과 지식계층의 사람들을 사로잡아 가고, 다양한 이방 민족들을 사마리아로 이주시킵니다.(24절) 민족끼리 결집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혼합정책으로 사마리아에 남아 있는 자들 중에 더 이상 제사를 들 일수 없는 일로 반항하는 자들이 일어납니다. 그 사람들을 성경은 '사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25절) 이런 반항을 잠잠하게 하기 위해서 포로로 잡아간 제사장 중에 한 사람을 불러와서 제사를 드리게 합니다.(27-28절)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는 온갖 종교의 신전이 됩니다.(29-30절) 참혹할 정도로 혼합된 신들의 제사가 사마리아에서 드려집니다. 그 중에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런 혼합 민족, 혼합종교 때문에 이후에 유대인들은 사마리아를 저주 받은 땅으로 취급합니다. 그래서 사마리아를 피해 다녔고, 사마리아인을 이방인 취급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런 취급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사마리아 여인'을 통해서 사마리아의 역사적 아픔을 품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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