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9장 | 권민철 | 2023-03-0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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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롭게 창조 됩시다” (1월 Q.T) - 요한복음 19장 ⁕ 예수님과 빌라도의 만남이 나옵니다.(1-16절) 빌라도는 먼저 ‘채찍’으로 예수를 칩니다.(1절) 로마의 ‘채찍’은 가죽으로 만든 줄 끝에 금속이나 동물의 뼈가 붙어 있습니다. 이런 채찍으로 친 다음 예수를 ‘조롱’합니다.(2-3절) 가시관으로 만든 왕관, 왕들이 입는 자색 옷, 유대인의 왕이라는 외침이 그렇습니다. 예수를 왕의 형상처럼 만들어 놓고 그 앞에서 뺨을 때리며 멸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예수를 비인격적인 존재로 만들지만 예수께서는 그 모든 것을 우리를 위해 참으십니다.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우리는 철저하게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해야 합니다. ⁕ 유대인들은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빌라도를 향해 소리칩니다.(6절) 그들이 예수께 덧씌운 죄명은 자신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 ‘신성모독’입니다.(7절) 하지만 그 이면에는 ‘율법’의 카테고리 속에 얽혀 있는 자신들의 ‘유익’과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율법’보다 ‘생명’을 더 소중히 여기시고, 율법에서 금지한 안식일에 병을 고치신 일이나, 병자, 여자, 종, 세리, 죄인, 이방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결국 율법보다 한 사람의 ‘생명’을 더 소중히 여기시는 예수를 큰 무리들이 따르자, 큰 위협을 느끼고 그들은 예수를 고발한 것입니다. ⁕ 로마 총독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고발한 예수에게서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그래서 세 번이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소”라고 말합니다.(18:38, 19:4, 6절) 하지만 그는 예수께 죄가 없는 줄을 알면서도 ‘리토스트론’(돌을 박은 자리)에 앉아서 예수를 십자가 처형에 넘겨줍니다. “이 사람을 놓아주면, 총독님은 황제 폐하의 충신이 아닙니다. 자기를 가리켜서 왕이라고 하는 사람은 누구나 황제폐하를 반역하는 자입니다.”라는 군중의 외침이 그를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12절) 힘 있는 권력자이지만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결국 그도 ‘진리’보다 ‘유익’을 선택합니다. 예수의 죽음을 결정한 유대인들과 빌라도는 자신들의 ‘유익’ 앞에 ‘진리’를 버린 자들입니다. 이렇게 ‘진리’보다는 자신의 ‘유익’을 손쉽게 선택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자기중심성에 쉽게 이끌리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일상가운데 자신의 ‘유익’과 ‘진리’ 앞에 늘 서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이제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숨을 거두십니다.(17-30절) 로마의 정치범들에게 사용되는 십자가에는 ‘죄명’, ‘출신’, ‘이름’을 적게 되어 있습니다. ‘유대인의 왕 나사렛 사람 예수’가 십자가 위에 달린 예수의 ‘명패’입니다.(19절) 그리고 병정들은 예수의 옷을 네 몫으로 나누고, 속옷도 제비뽑아 가집니다.(23-24절)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는 옷을 걸치지 않은 모습으로 사람들 노출되어 있습니다. 세상은 철저하게 인간의 가치가 없는 ‘비인격자’로 대우합니다. 박두진 시인의 <갈보리의 노래>라는 시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 예수의 십자가 밑에는 그를 따르던 여인들만 있습니다.(25절) 그리고 사랑하는 제자에게 자신의 사랑하는 어머니를 맡기십니다.(26-27절) 서로를 ‘가족’으로 받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는 ‘목마르다’라고 소치 치십니다.(28절) 이것은 육체의 목마름보다 두려움으로 인하여 자신을 떠난 사람들을 향한 갈증이자, 자신을 속 시원하게 해 줄 사람들이 없는 세상을 향한 갈증일 것입니다. 그리고 ‘다 이루었다’고 하십니다.(30절) ‘보내심을 받은 자’로 오신 예수께서는 보내신 분의 뜻을 다 이루신 것입니다. 보내신 분의 뜻을 다 이루어 드리는 것을 ‘영광’이라고 합니다. 예수께서는 이 ‘영광’을 받으시면서 숨을 거두십니다.
⁕ 죽으신 후 죽음을 확인하는 로마의 ‘다리 꺾음’을 예수께서는 당하지 않으십니다.(31-37절) 이것은 출애굽 당시 유월절 ‘어린양’을 상기시켜주는 중요한 장면입니다.(출12:46절) 예수께서는 유월절 ‘어린 양’이 되셔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의 시신을 거두어서 무덤에 장사합니다.(38-42절)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라고 말했던 ‘니고데모’가 몰약에 침향을 섞은 향료를 가지고 와서 예수의 시신에 넣습니다.(39-40절) 예수를 인정하지 않았던 ‘니고데모’가 이제는 예수의 죽음 앞에 ‘향기’로 응답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요한이 들려주는 의미있는 장면입니다. 예수의 죽음 앞에서 ‘삶의 향기’로 응답하는 니고데모가 되는 것이 참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 앞에서 자신들의 유익만을 따지는 유대인들과 빌라도의 모습, 그런 세상을 보시면서 목마르다 외치시는 주님이 모습, 그리고 죽으신 예수 앞에 향기로 응답하는 니고데모의 모습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사람은 늘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질문합니다. 그것보다 먼저 왜 사는지를 질문한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게 됩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소개하는 말씀 앞에서 ‘왜’를 질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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