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1장 | 권민철 | 2023-03-0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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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롭게 창조 됩시다” (1월 Q.T) - 요한복음 11장 베다니에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이야기가 나옵니다.(1-44절) ‘베다니’는 ‘가난한 자의 집’, ‘자비의 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수도 예루살렘에서 4키로 떨어진 이곳은 당시 도시빈민들이 사는 동네였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가실 때에는 늘 이곳을 찾으셨습니다. 이야기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라버니 ‘나사로’가 죽을병에 걸린 일로 시작됩니다. 나사로의 소식을 들은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병이라고 하십니다.(4절)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에게 일어나는 일은 모두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나사로를 살리기 위해 예수께서는 자신을 돌로 치려고 했던 유대지방으로 다시 들어가자고 하십니다.(7절) 반대 하는 제자들에게 “낮에 걸어 다니면 햇빛이 있으므로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고 하십니다.(9절) ‘낮’과 ‘햇빛’은 일할 시간 즉 하나님의 일을 할 시간을 뜻합니다. 누구에게나 생명이 있는 한 하나님의 일을 할 시간 즉 낮 시간입니다. 먼저 ‘마르다’를 만나십니다.(17-27절)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지난 시점입니다. ‘나흘’이란 시간은 절망의 시간, 희망이 끊어진 자리를 뜻합니다. 주님이 계셨더라면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는 마르다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다.”라고 답하십니다.(25절) 이 말씀의 속뜻은 절망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부활’은 주님께서는 죽음을 넘어선 존재라는 뜻입니다. 죽음과 생명을 넘어선 예수께서 함께 하시니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말하는 것입니다. 이때 마르다는 “주님!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가 믿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27절) 생명의 부활을 믿는 사람에게는 이 고백만 있으면 됩니다. 이 고백이 사람을 살리는 능력입니다. 다음으로 ‘마리아’와의 만남이 나옵니다.(28-37절) 주님의 발아래에 엎드려서, 오라버니의 죽음으로 비통하여 괴로워하는 마리아를 보시고, 주님도 눈물을 흘리십니다.(35절) 주님은 결코 인간의 아픔과 무관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아파하는 자와 함께 아파하시고, 슬퍼하는 자와 함께 눈물을 흘리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의 이런 모습을 잠시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따뜻한 그리스도의 온기가 느껴지실 것입니다. 이제 죽은 ‘나사로’와의 만남이 나옵니다.(38-44절) 나사로와의 만남에서 중요한 것은 “돌을 옮겨 놓아라”, “나사로야, 나오너라”, “그를 풀어주어 가게 하여라”라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나사로가 살아난 것은 주님의 명령에 응답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43절) 말씀의 에너지를 삶의 에너지로 바꾸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죽은 나사로가 살아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말씀에 응답할 줄 아는 자가 ‘산 자’라는 것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살아있으나 말씀에 응답하지 못하는 자는 ‘죽은 자’입니다. 나사로는 죽은 자였지만 말씀에 응답하였기에 살아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사건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말씀에 사건을 일으키지 못하면 주님이 보시기에는 ‘죽은 자’입니다. 나사로 이야기를 육신의 죽은 자가 살아난 이야기로 국한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육신으로 죽은 자가 살아난 사건이지만, 이야기의 핵심은 말씀에 응답하여 사건을 일으키는 사람이 부활의 생명을 가진 자라는 것입니다. 나사로 사건 이후 대제사장 ‘가야바’ 이야기가 나옵니다. 유대의 최대의결 기관인 산헤드린 공의회가 ‘나사로 사건’으로 소집됩니다.(47절)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따른다는 이유에서입니다.(45절) 공의회 사람들은 예수로 인하여 로마가 자신들의 땅과 민족을 약탈할 것이라고 민족을 걱정합니다.(48절) 항상 기득권자들은 겉으로는 나라를 내세우지만 속내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잃는 것을 가장 두려워합니다. 이때 대제사장 ‘가야바’는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해서 죽어서 민족 전체가 망하지 않는 것이 당신들에게 유익하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소”라고 말합니다.(50절) 그는 ‘대’를 위해서 ‘소’를 희생시켜야 한다는 우리에게 익숙한 논리를 펼칩니다. 결국 이 논리에 대중들은 선동되었고, 후에 예수를 죽게 만듭니다. 정말 맞는 말일까요? 우리는 예수께서 들려주신 99마리 양과 1마리 양 이야기를 잘 압니다. 예수께서는 한 마리와 아흔 아홉을 동일시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한 마리를 함부로 하는 세상은 아흔 아홉도 함부로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마리를 소중히 여기는 세상은 아흔 아홉도 소중히 여깁니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라고 선포하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주님은 한 영혼을 위해서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예수의 이 말씀에 고개를 끄덕이는 자가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세상은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해서 죽어서 민족 전체가 망하지 않는 것이 당신들에게 유익하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소”라는 가야바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습니다. 오늘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는 이야기는 한 사람의 생명을 부활시키기 이야기입니다. 주님의 도우심 없이는 죽을 수밖에 없는 자들을 주님이 어떻게 살리지는 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죽은 자들을 살리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소명이라는 메시지도 함께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지 못하는 자들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 우리들의 소명입니다. 이 소명 앞에 거룩하게 설 수 있는 여러분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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