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8장 | 권민철 | 2022-07-1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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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수훈을 마치신 예수님은 본격적으로 사역을 시작하십니다. 그 중심에는 ‘이적이야기’가 있습니다. 특별히 마태복음 8-9장에서는 10가지 이적이야기가 집중적으로 나옵니다. 이적 이야기의 핵심 메시지는 새로운 세계의 도래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먼저 ‘나병환자’를 고치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1-4절) 나병은 당시 하나님께 가장 저주받은 병으로 취급받았습니다. 예수님은 나병환자의 간절한 소원 앞에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고 “그렇게 해 주마, 깨끗하게 되어라”하고 말씀하십니다.(3절) 나병환자에게 절대하지 말아야 할 행동은 ‘만짐’입니다. ‘만짐’을 우리는 ‘제 3의 눈’이라 부릅니다. 만지심을 통해 저주의 시선을 넘어 또 다른 시선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의도적인 ‘손 내밂’입니다. 꽉 잡은 손은 어떤 말보다 더 많은 것들을 들려줍니다. 예수님의 손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주는 따듯한 손길이었습니다. 그 손이 바로 ‘능력의 손’이 되어서 병을 고친 것입니다. 사랑의 손은 능력의 손이라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백부장의 종을 고치시는 이적이 나옵니다.(5-13절) 이 이야기 속에는 보이지 않는 긴장감이 있습니다. 먼저 백부장은 유대인들이 증오하는 로마 군대의 지휘관이며, 이방인입니다. 그런 백부장이 고쳐 달라는 사람은 중풍병에 걸린 자신의 하인입니다. 백부장을 보고 예수님은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서 아무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라고 선포하십니다.(10절) 이방인에게 내려진 이런 평가는 유대인들에게 엄청난 긴장감과 호소력을 가지게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역사는 ‘이방세계’에도 작동하고 있으며, 유대인들보다 이방인이 더 큰 ‘믿음’의 소유자자 될 수 있음을 넌지시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방인, 백부장이 소유한 믿음이란 어떤 것일까? 그는 종의 아픔을 ‘공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보다 못한 신분의 하인이지만 모르척하지 않고, 예수님 앞으로 가져 올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인의 아픔을 공감하고 지켜주려는 백부장의 마음을 예수님은 ‘믿음’이라고 하십니다. ‘ 또한 백부장의 믿음은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입니다. “내가 고쳐주마”라는 주님의 말씀에 “그저 한 마디 말씀만 해 주십시오.”라고 응답합니다. 비록 이방인이지만 백부장은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은 말씀으로 작동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백부장을 향해 “네가 믿은 대로 될 것이다.”(13)라고 응답하십니다. 말씀을 신뢰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주시고자 하는 응답일 것입니다. 이 복이 우리들에게 임하기를 소망합니다.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치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14-17절) 베드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은 장모의 아픔을 아시고 손을 얻어서 열병을 고쳐주십니다. 이런 예수님을 향해 성경은 “그는 몸소 우리의 병약함을 떠맡으시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지셨다”고 합니다.(17절) 이런 분이 바로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십니다. 주의 깊게 보면 8-9장의 말씀은 매우 정교하게 배치되어 있습니다. 세 가지 기적 이야기를 마칠 때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일꾼을 부르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부르심의 이야기를 관통하고 있는 명령어는 “따르라”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기적이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생명회복’ 사건은 제자들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율법학자 한 사람이 나아와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18-22절) 그때 예수님은 제자직의 대가가 무엇인지를 냉엄하게 일깨워주십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십니다. ‘내 것’ 없다는 뜻입니다. 자기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제자의 길을 갈 수 없다는 냉엄한 말씀입니다. 제자가 치려야 할 대가치고는 너무 무겁습니다. 제자의 길은 이렇게 무거운 길일까요?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 세상에 정말 ‘내 것’이 있을까요? 건강, 재능, 시간, 나이, 재산 등이 정말 내 것일까요, 건강 잃으면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쯤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님을 아는 것이 참 지혜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주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내게 주어진 것들을 ‘선물’로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이 바로 ‘제자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 주어진 것을 타인을 위해서 기꺼이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주님을 따르겠다는 제자에게 “죽은 사람의 장례는 죽은 사람들이 치르도록 두어라”고 하십니다.(21절) 냉엄한 말씀으로 들릴 수 있지만, 얽매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어딘가에 얽매이기 시작하면 이유 없는 일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는 긴박하고 사정이 다 있습니다. 이렇듯 ‘내 것’이라는 생각은 인간을 얽매여 놓습니다. 가끔은 한 발자국도 앞으로 향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제 풍랑을 잔잔하게 하는 이적이 나옵니다.(23-27절) 인간을 넘어 자연 세계까지 다스리시고 계심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여기서 ‘풍랑’은 ‘anemos’로 세상에서 불어오는 ‘바람’이나 ‘풍조’를 뜻하기도 합니다. 이기주의, 세속주의, 물질주의가 지금 세상의 풍조입니다.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제자들처럼 “살려주십시오. 죽게 되었습니다.”라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의 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이런 냉혹한 현실 속에서 삶을 잠잠하게 할 수 있는 힘은 바로 아버지의 품에 있다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마지막으로 귀신들린 두 사람을 고치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8장28-34절) 귀신이란 어떤 존재일까? 흰옷입고, 피를 흘리는 눈에 보이는 그런 존재일까, 그런 존재가 귀신이라면 크게 두려워할 것 없고, 무섭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귀신은 어떤 존재일까요? “하나님의 아들이여, 당신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는 귀신의 소리에 주목해야 합니다.(29절) 귀신이란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는 이 한 문장을 인간의 일상에 깊이 심어주는 존재입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놓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일상에서 하고 있는 어떤 일이나 계획이 하나님과 무관하다는 생각을 들게 합니다. 그렇게 해서 영적으로 무감각하게 만들고, 기도와 간구도 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소통을 끓어 놓는 것이 귀신입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참으로 귀신은 참으로 무서운 존재입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돼지 떼로 보내시며 하신 말씀은 ‘가라’라는 한 단어입니다. ‘가라’라는 이 한 단어를 우리도 일상에서 과감하게 외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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