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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7장 권민철 2022-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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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심의 153, 회복의 153” - 마태복음 7장

 

7장은 산상수훈의 마지막 장입니다. 

먼저 예수님은 “너희가 심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남을 심판하지 말아라.”라고 하십니다.(1-6절) 

이 말씀의 핵심은 ‘말’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말을 할 때 염두에 둬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말로 ‘남을 심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정죄하지 말라’는 의미와 같은 뜻입니다. 

정죄한다는 것은 상대에게 죄가 있다고 단정하는 것입니다. 단정하는 것은 상대방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는 행위입니다. 누군가의 가능성을 배제하는 행위에는 반드시 심판이 따릅니다.

“너희가 남을  심판하는 그 심판으로 하나님께서 너희를 심판하실 것이요”라고 하십니다(2절)

  유대인에게는 “하나님은 우리가 이웃을 바라보는 그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신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속담이지만 두려운 심판입니다. 이런 두려운 마음 있다면 타인을 함부로 심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구하라’, ‘찾으라’, ‘두드려라’라는 기도의 가르침이 나옵니다.(7-12절) 

특이한 것은 세 개의 동사가 나오지만 ‘목적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무것이나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된다는 말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목적어’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미 앞에서 “너희는 먼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라고 하셨습니다.(6장33절)

하나님 나라의 의는 무엇일가요? “그러므로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여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본 뜻이다.”라고 예수님은 친절히 설명해 주셨습니다.(12절) 

이 말씀은 눈을 크게 뜨고 봐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해하신 ‘율법’과 ‘예언서’의 본 뜻(결론)은 ‘남을 대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바울은 “모든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라는 말씀으로 잘 해석해 주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에게 하나님은 길을 열어주십니다.  

 

‘좁은 문, 좁은 길’에 대해서 예수님이 언급하십니다.(13-14절)

산상수훈의 특징은 실천의 문제를 강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몸으로 살아내는 실천 없이는 진실한 믿음이 세워지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라는 은유적인 표현은 제자들이 선택해야 할 삶의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넓은 문 혹은 넓은 길이란 기존의 관습이나 체제를 내적으로 수용하고 살아가는 삶을 가리킵니다. 

반면 좁은 문 혹은 좁은 길은 기존 체제에 동화되기를 거부하고 새로운 세상을 향해 노력하는 삶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지적하시는 ‘넓은 문, 넓은 길’은 유대교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것을 말합니다. 

가령 예수님이 행하신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 이방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 세리와 죄인들과 식사하는 것, 

병든 사람들에게 손을 얹어 기도하는 것 등은 당시 유대교의 통념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유대인의 길을 그대로 인정하고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생명’보다 유대인들의 ‘제도’나 ‘권위’를 앞세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좁은 길이란 하나님이 주신 모든 생명의 가치를 우선순위에 두는 것입니다. 

좁은 길의 주인은 생명을 위해 사명을 다하는 사람들입니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면 그 속에 생명이 있기에 반드시 열매를 맺습니다.(15-20절) 꼭 기억합시다. 

  

산상수훈의 마지막 교훈인 동시에 결론으로 예수님은 ‘반석위에 집을 지으라’고 하십니다.(24-29절)

신앙생활이란 ‘들음’과 ‘행함’, ‘아는 것’과 ‘살아 내는 것’ 사이의 간격을 좁히기 위한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삶으로 번역되지 않는 앎은 교만에 빠지기 쉽습니다.

 예수님은 행함이 없는 신앙생활의 허망함을 심판의 이미지로 보여주십니다. 

‘어리석은 사람’, ‘모래’, ‘무너짐’이 그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면 집이 무너지는 것처럼 그 무너짐이 심하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27절) 행함이 없는 신앙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를 비유를 통해 들려주십니다. 

그렇다면 들음과 행함의 일치를 어떻게 이룰 수 있을까요, 여기서 ‘일치’란 말을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일치란 같은 크기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들음과 행함을 일치시키는 사람은 세상에 없습니다. ‘

일치’란 같은 목표를 두고 그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반석위에 집을 짓는 삶입니다. 

 

 28-29절을 보면, 산상수훈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을 “그의 가르침에 놀랐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 있게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엘버트 노런은 예수와 바리새파 사람의 가르침에 대해서 “예수는 진리를 권위로 삼았고, 바리새파 사람들은 권위를 진리로 삼았다.”라고 말했습니다. 

진리를 권위로 삼는 사람은 진리를 실천하는 사람이며, 권위를 진리로 삼는 사람은 권위에만 머무는 사람입니다.

특별히 진리를 권위로 삼는 사람은 삶으로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진리를 권위로 삼고, 말씀실천으로 반석위에 집을 짓는 여러분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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