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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권민철 2019-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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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jingwanmission.onmam.com/bbs/bbsView/57/5660074

   나치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있었던 일들을 들으면 언제나 가슴이 아프다

지금 두 번째 읽고 있는 소설책에서도 나치수용소에서 일어난 일들을 

소설속이지만 진실에 가깝게 기록하고 있다.

  아침 점호시간 살아남은 사람들은 아침마다 점호할 때 얼굴을 검사받는다.

수용소장교는 노동할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구별해 낸다

그들은 얼굴빛을 본다. 사람들은 경비병이나 친위대원 앞에서 지치거나 병들었다는 

판결을 받지 않기 위해서 별별 짓을 다 한다

수염 때문에 병자로 간주되어 석탄주사를 맞을까봐 조금이라도 젊어 보이려고 굴뚝에서

그을음을 긁어모아 머리에 뿌리기도 하고, 점호 장에서 야윈 다리로 힘차게 걸으려고 

온갖 노력을 다한다

줄밖으로 나가면 가스실로만 가는 것이 아니라 총살되기도 하고, 의료실험용이 되기도 하고

비누가 되기도 한다. 시체에서 짜낸 지방으로 만든 비누이다.

아침 점호시간에 대열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도록 몸부림치는 사람들의 얼굴을 상상해 본다

안 그런 하는 것이다. 그것만이 자신이 살아남는 길이다

그러기에 수용서 안에서는 동정심, 연민, 사랑 따위는 자살행위라고 한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의 삶에 강한 동정심, 연민이 생긴다.

소설의 다른 한편 예수를 죽인 안나스 대제사장이 나온다

그는 죽음을 앞둔,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된 예수님을 불러놓고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서도 믿는 체하는 기술을 나는 알고 있다.” 대제사장이지만 

사람들 앞에서 믿는 하는 것이다. 같은 이지만 너무 다르다.

 무기력한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하는 것과 남을 속이기 위한 것은 다르다

우리 신앙도 이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님은 어디에 사랑과 연민을 느끼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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