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1장 | 권민철 | 2023-03-0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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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롭게 창조 됩시다” (1월 Q.T) - 요한복음 21장 부활하신 주님께서 ‘디베랴’ 바닷가에서 다른 제자들을 만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디베랴’는 ‘티베리우스’ 황제를 위해서 ‘갈릴리’에 세운 인공도시입니다. 도시를 세우기 위해서 막대한 노동력과 세금을 지불해야 했던 백성들에게 ‘디베랴’는 아픔의 땅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그곳에서 일곱 명의 제자를 만나십니다.(2절) ⁕ 먼저 고기 잡으러 간 제자들을 만나십니다.(3-14절) 제자들은 베드로를 중심으로 고기를 잡으러 갑니다. 동틀 무렵 고기 잡으러 간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나타나셔서 그물을 오른쪽으로 던지라고 하십니다. 말씀대로 그물 가득히 고기가 잡힙니다. 고기를 잡고 돌아온 제자들에게 주님은 “와서 아침을 먹어라”라고 하십니다.(12절) 그물 속에 고기를 건지는 동안 예수께서는 잡은 고기로 ‘밥상’을 차리신 것입니다.(9-10절, 13절) 주님이 차려준 밥상 앞에서야 제자들은 예수를 알아차립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도 저녁 식사자리에서 빵을 떼어주실 때 예수를 알아차립니다.(눅24:30-31절) 어느 시대, 어느 민족에게나 ‘밥상’은 ‘가족’을 상징합니다. 특별히 환대를 중요시 하는 광야지역 사람들에게 ‘식당공동체’는 매우 중요합니다. 지금 예수께서 차려준 밥상은 제자들을 있는 모습 그래도 받아주시겠다는 말없는 ‘용서’와 새로운 미래를 향해 가라는 ‘격려’가 담겨 있습니다. 그런 사랑의 밥상 앞에서 제자들의 눈이 떠진 것입니다. 못난 자식이지만 있는 그대로를 받아주시고, 아침에 밥상을 차려주시던 어머니의 손 길 같은 것입니다. 따뜻한 주님의 사랑으로 다른 제자들도 부활을 체험합니다. 주님은 광야에서 원망하는 백성에게 만나로 ‘밥상’을 차려주셨고, 죽여 달라는 엘리야에게 천사를 통해 ‘밥상’을 차려주셨습니다. 이러한 사랑과 격려의 밥상은 성경 곳곳에서 나옵니다. 우리 주변에도 사랑의 밥상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서 그 밥상은 차려야 할 차례입니다. ⁕ 아침 식사 후 드디어 베드로와의 대화가 시작됩니다.(15-19절)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스승의 죽음 이후 ‘3’이란 숫자는 베드로에게 큰 상처로 남아 있습니다. 사랑하던 자를 세 번 부인한 기억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이제 베드로와 그 상처를 치유할 시간을 가지십니다. 세 번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주님의 물음에 베드로는 “주님, 그렇습니다”고 응답합니다. 두려움 때문에 잠시 가려졌던 내면의 ‘사랑’을 끄집어내는 순간입니다. 두려움 때문에 스승을 부인했던 아픔 마음을 ‘사랑’으로 치료하시는 것입니다. 세 번 부인했던 그 입술로 세 번 사랑한다는 고백을 하게 함으로 깨끗이 치료해 주십니다. 사랑한다는 베드로의 응답에 주님은 “내 양을 먹이라”라고 하십니다. ‘사랑’의 고백 앞에 주님은 ‘신뢰’로 응답하십니다. 그리고는 베드로에게 양을 먹이기 위한 ‘목자의 길’을 말씀해 주십니다. 이 목자의 길은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입니다.(18-19절) 남들이 ‘네 팔을 벌리고’, ‘너를 묶어서’라는 말은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자신의 내어줌으로 다른 사람을 살리는 길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지금 베드로에게 그 길을 함께 가자고 하십니다. ⁕ 베드로는 다른 제자의 미래에 대해서도 궁금해 합니다.(20-23절) 사랑하는 제자가 따라오자 베드로는 주님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라고 물어봅니다.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이런 호기심이 있습니다. 그때 주님은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라고 응답합니다. 남들을 궁금해 하기보다 자신의 길이나 온전히 걸으라는 뜻입니다. 서로의 소명이나, 은사를 비교하지 말고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온전히 걷는 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삶의 모습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모습이 있습니다. 타인의 능력, 은사, 소명을 나와 또 다른 누군가와 비교합니다. 이런 비교가 지금 내가 서 있는 삶의 자리를 흔들어 놓는다는 것을 모른 채 말입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십자가의 길’이 있습니다. 내가 죽어야만 살리는 사람들과 일들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 길을 묵묵히 걷는 것이 ‘소명’입니다. 천박한 호기심으로 다른 사람의 길을 엿보다 보면 내 길이 삐뚤어집니다. 삐뚤어진 길을 걷는 사람의 현실을 비틀거림입니다. 비틀거리며 먼 길을 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온전히 자신만의 소명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그런 여러분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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